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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생각/삶 돌아보기

구원에서 구원

천국이 멀어지는 교회일 수록 신앙과 멀어지고 부도덕한 모습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찬가지로 구원의 개념도 이 현실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비도덕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현실과 신앙이 가까워 지기 위해서는 신앙의 기본 개념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교회에서 강조하는 두 가지가 천국과 구원.

특히 이 구원은 교회 안에서 신앙을 시작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였던 것 같아요.

때때로 이 구원을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 결과는 도덕무용론으로, 비도덕적인 모습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죠.

제가 있던 교회 중에는 구원 받은 날을 생일로 지정하고 기억하라고 하는 교회도 있었어요.

언제 구원 받았는지 정의할 수 있을까요?

대체 구원이 무엇이길래 그런 걸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그리스어로 'σωτήριον(쏘테리온)'로, 'σωζω(쏘조:구하다)'의 명사형 표현이에요.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현실적인 구원, 즉 로마로부터의 해방이었어요.

하지만 예슈아의 구원은 그것이 아니었어요.

심지어는 적이었던 로마도 구원의 대상이었죠.

 

로마 이상의 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천국이 '하늘의 통치'가 이 땅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라면, 적은 '악의 통치'가 되겠죠.

그 악은 눈 앞의 제국도, 저 멀리 죽은 뒤의 세상에 있는 적도 아니었어요.

바로 인간성(σάρξ:싸륵스) 그 자체였죠.

흔히 육, 또는 육체라고 알고 있던 이 단어는 실은 인간성 전체를 의미하는 단어에요.

다시 말해 우리가 인간적인 본능에 사로 잡혀 하나님과 멀어진 상황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죠.

구원의 의미도 하나님과 가까워 지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겠죠.

 

흔히 말하는 예슈아의 재림은 원어로 'παρουσία(파루시아)'라고 해요.

'함께 있음'이라는 의미인데, 많은 교회들이 이것을 재림으로만 해석하며 나중에 이루어질 막연한 미래의 일로 오해하기도 해요.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신앙생활인데, 이 파루시아를 먼 얘기로 치부해 버리면 지금의 삶의 의미는 희미해 지고 말아요.

결국 파루시아는 예슈아의 첫 등장, 성령 강림, 예슈아의 재림 전부를 포함하는 단어였던 것이죠.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였어요.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 했었죠.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눈 앞의 삶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고요.

이 인간성의 한계를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이 땅에서 하늘의 통치를 완성하는 것.

즉, 완전한 인간성을 완성해 가는 그것이 구원의 진정한 의미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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