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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말씀/말씀 뜯어보기

베드로서(에피스톨레 페트루)

흔히 교회를 대표하는 두 명의 사도로 파울로스와 페트로를 들죠.

파울로스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고 한다면,

페트로는 예후다인 특히 '디아스포라를 위한 사도'라고 정의해요.

하지만 사실 이 둘은 어느 특정 그룹을 위한 사도는 아니었어요.

페트로의 편지는 성도 전체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죠.

 

이 책의 원제는 Ἐπιστολή Πέτρου로 '페트로의 편지'라고 해석될 수 있어요.

어느 교회를 특정하기보다는 성도들에 대한 페트로의 마음을 담고 있는 책이죠.

이 책이 신약으로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고,

특히 두 번째 편지는 신약의 책들 중 거의 마지막으로 인정 받았다고 해요.

어부였던 페트로가 미려한 문체의 그리스어로 글을 쓸 수 있겠냐는 의혹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대신 필사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될 사항은 아니었죠.

 

첫 번째 편지의 주제는 '신앙인이 고통 받는 이유'에요.

이 서신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어요.

  1. 신앙인의 고난
  2. 거듭남의 정의
  3. 신앙인의 생활
  4. 믿음의 승리(재림)

페트로는 새로운 신앙인들이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는 모습을 안타까워 했어요.

선한 삶을 살려는 자들에게 부당한 고통이 따르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죠.

그래도 신앙에는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는 점을 들어 그들에게 인내를 요구했어요.

그리고 하나님과 로마 제국 양쪽에 충성하라고 말해요.

이것은 일찍이 예슈아가 가르쳤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와 같은 맥락이에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현실은 사회의 구성원이거든요.

이 부분을 간과하면 신앙인은 비도덕, 비윤리적인 존재가 되고 말아요.

어느 한 쪽이 아닌 양 쪽 모두에 정성을 다하는 삶은 굉장히 힘들어요.

그래서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괴롭고 피곤한 삶이 될 수밖에 없죠.

 

이 책에서 두드러지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어요.

  1. 거듭남
    원어로는 ἀναγεννάω(아나겐나오)라고 하며 '재생하다'는 단어에요.
    예슈아도 이 아나겐나오가 되지 않으면,
    하늘의 통치를 볼 수 없다고 했죠.
    싸륵스(인간성)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은 상태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2. 재림
    원어로는 παρουσία(파루시아)라고 하며 '함께하다'는 단어에요.
    예슈아의 초림, 성령의 강림, 예슈아의 재림이 모두 이 파루시아에요.
    여기서는 예슈아가 다시 왔을 때 이루어질 일들을 희망하고 있어요.
    그것을 위해 인내와 복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죠.

 

두 번째 편지의 주제는 '거짓을 이기는 진리'에요.

이 서신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어요.

  1. 믿음의 확실성
  2. 거짓 예언자와 거짓 교사를 경계
  3. 믿음의 승리(재림)

신앙인이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소망을 잃는 것이에요.

다른 서신에서도 여러 번 강조되었던 주의사항은 거짓에 속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거짓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잃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거든요.

예슈아가 부활하여 하나님 곁으로 간 뒤,

예슈아는 다시 돌아와 함께한다는 약속을 남겼어요.

하지만 이 재림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신앙인들을 혼란에 빠뜨렸죠.

예슈아의 약속이 부정되면서 근본적인 소망이 흔들리기 시작한 거에요.

파루시아가 이루어 지는 것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데,

이 막연한 기다림을 흔들어 버린 것이죠.

 

페트로는 이 막연함을 명쾌하게 답했어요.

"이것은 약속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인내입니다.

그 분은 모두가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서신에서 다시 한 번 아나겐나오와 파루시아,

그리고 μετανοεω(메타노에오)의 개념을 정리해요.

이 단어의 의미는 '뉘우치다'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회개에요.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여 거듭나고 경건을 이루게 되면,

우리가 소망하는 하늘의 통치를 보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삶은 거처할 곳이 없는 나그네와 같아요.

그러나 그 길의 목적은 분명하죠.

그 길의 끝에 있는 소망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괴로운 나그네길을 참고 걸을 수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이 한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주께는 하루가 1000년 같고 1000년이 하루 같습니다.

약속하신 주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더딘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주의 날은 도둑 같이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