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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말씀/말씀 뜯어보기

요한서(이요안누)

이 앞의 서신들이 디카이오스, 생활의 교훈, 신앙의 특징, 교회, 구원, 지도자의 자세 등을 다뤘어요.

예슈아는 신앙 그 자체였기 때문에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았죠.

그러나 영지주의가 생기면서 이 부분의 설명도 필요해 졌어요.

 

영지주의는 그노시스 학파라고 해서,

'신의 순수한 작품은 영 뿐이고 물질은 악마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하는 학파에요.

물질 전체를 부정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슈아의 신성은 인정해도 인성은 인정하지 못했던 거에요.

그들은 예슈아가 보인 몸은 환상일 뿐으로 인간의 몸으로 온 적이 없다고 주장해요.

예슈아의 제자로 직접 예슈아를 겪었던 요하난은 그 주장을 인정할 수 없었죠.

요하난은 이 영지주의자들을 '크리스토스의 적'이라고 규정하며 강력하게 비판했어요.

이 책이 바로 Ἰωάννου, '요하난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아마 에피스톨레가 생략된 제목이 아닐까 해요.

 

첫 번째 편지의 주제는 '바른 믿음과 사랑'이에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어요.

  1. 하나님의 빛
  2. 크리스토스의 적
  3. 하나님의 사랑
  4. 성육신과 삼위일체(Τριάδος)

요하난의 서신들 중 이 서신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신앙의 주체를 정확히 정의하기 때문이에요.

특히 예슈아의 속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정리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이러한 설명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스의 적들은 여전히 말씀을 왜곡하고 있죠.

 

두 번째 편지의 주제는 '거짓 교사에 주의'에요.

정말 짧은 이 서신은 거짓 교사를 '크리스토스의 적'이라며,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강하게 주의를 주죠.

우리는 적그리스도(크리스토스의 적)라면 강력한 정치가나 세도가를 떠올리지만,

실은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사이비 교주들이 크리스토스의 적에 가까워요.

결국 그들은 신앙인들의 피를 빨며 강력한 정치가나 세도가처럼 변하거든요.

초대 교회에도, 현대 교회에도 이 거짓 교사와 교훈은 두려운 적이었어요.

사실, 거짓 교훈을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게도 '예슈아'가 왜곡되었는 지만 확인하면 되요.

 

세 번째 편지의 주제는 '선행의 실천'이에요.

요하난은 가이우스가 형제와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극찬했어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죠.

그래야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 테니까요.

요하난은 교만하고 나그네를 박대한 디오트레페스를 규탄했고,

그 반대인 데메트리우스를 칭찬했어요.

겸손하고 진실한 대접, 그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첫걸음이지요.

 

요하난의 서신들은 기본적으로 비슷한 문체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예슈아가 어떤 존재인지 강조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강조하고 있어요.

 

예슈아를 깊이 있게 바라보는 점에서,

요하난의 복음서와 동일한 저자라고 예측할 수 있죠.

크리스토스(예슈아)를 깊고 정확하게 정의하면서,

동시에 크리스토스의 적도 어떤 존재인지 주의를 주죠.

믿음의 대상이 왜곡되면, 그 믿음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에요.

 

사랑을 실천하고, 기쁨의 교제를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완성이에요.

신앙인들의 모임이 필요한 이유이죠.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파합니다.
이는 여러분과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귐입니다.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가득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