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를
네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은밀한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장 2절~4절)
저는 헌금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어렸을 적, 적은 돈이지만 정말 성실하게
헌금하며 떳떳하고 자랑스럽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른이 된 뒤에는 의문이 생겼어요.
'성경에서 헌금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헌금을 요구하실까?
그리고 이 교회는 왜 이렇게
헌금의 종류가 많은 걸까?'
10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여러 교회들을 돌아다니며 어떤 모습으로
헌금이 이루어 지는지 살펴 봤어요.
군인이나 환자를 찾아가 위로하고,
헌금으로 그들을 지원하는 교회를
본 적이 있어요.
아예, 헌금이 없고, 목사가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운영되는 교회도 있었어요.
작은 교회에서는 여유 있는 성도가 어려운
성도를 금전적으로 도와 주는 경우도 있었어요.
여러 모습을 본 저는 확신을 가지고
원래의 교회로 돌아 왔어요.
그리고 보았죠.
자선도 없고, 사랑도 없고,
형식만 갖춰진 모습들.
헌금을 많이 낸 돈 많은 성도는 칭찬을 받으며,
인품과 무관하게 장로로 추대 되었고,
가난한 성도들은 그 사람을
부러워 하거나 시샘했죠.
그리고 목사님은 점점 더 얼굴에
기름기가 돌더라고요.
이 교회에서 과연 누가 겸손한
모습인지 찾기가 어려웠어요.
(누가복음 20장 46절~47절)
교회 안에서 헌금의 액수로
계급까지 나눠 지는 듯 했어요.
하지만 이 교회에서 대외적인
봉사를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어요.
노블리스 오블리제? 없었어요.
정말 선량한 사람이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교회가 크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죠.
많은 성도들은 항상 교회 내부의 일로 바빴고
바깥에서 그 어떤 봉사를 하지 못했어요.
봉사란 오직 교회에서 뿐이었어요.
그리고 그 봉사는 헌금과는 별개였죠.
교회는 점점 성도들에게 더 많은 헌금을
요구했고, 더 많은 봉사를 요구했어요.
가난한 성도들은 더욱더 가난해 지고,
괴로워 하면서도 복을
받을 거라는 막연함에 빠져 있었죠.
하나님의 복을 누리라던 목사님은
세상복을 풍족하게 누렸어요.
과연 그 헌금에 어떤 사랑이 있고,
어떤 자비가 있었을까요?
(누가복음 11장 40절~44절)
십일조...
10분의 1이 하나님의 것이니 돌려 드려야
한다면 10분의 9는 확실히 제 것인가요?
아니오.
모든 인류(10분의 9)를 대표하여 희생하신
예수(10분의 1)를 의미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된 거에요.
가난한 성도들에게 요구된 것이 아니라,
목사와 장로들에게 가난한 성도를 돕기 위한
사랑의 실천으로 요구된 것이에요.
십일조로 교회가 커지고,
십일조로 목사가 살찌면,
우리 이웃들은 무엇을 받은 거죠?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받으신 거죠?
헌금은 헌신의 일부에요.
헌신은 사랑의 실천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에요.
하나님은 사랑이 충분하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
우리가 사랑을 전해야 할 대상은
우리 주변이에요.
그것은 자유로운 사랑의 표현이지,
형식에 매인 의무가 아니에요.
헌금은, 헌신은, 봉사는,
교회의 화려함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교회의 선량함을 위한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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