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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06월01일 인내는 통치자를 설득할 수 있고 부드러운 혀는 뼈를 녹일 수 있다. (잠언 25장15절) 항상 입에 날이 서있는 나는 불필요하게 적을 만드는 일이 많았습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하더라도, 조금은 참아보고 부드럽게 말했어야 했습니다. 가슴에는 인내가 가득하고, 입에는 화평이 가득하길 원합니다.
유다서(에피스톨레 유다) 신앙에서 가장 두려운 위협, 바로 거짓이죠. 초대 교회를 위협했던 거짓 교훈으로는, 그리스/로마 신화, 유대교 교리 등이 대표적이었죠. 하지만 사도들이 가장 경계했던 거짓 교훈은 바로 영지주의였어요. 하나님의 존재와 특징 자체를 완전히 왜곡해 버렸으니까요. 페트로와 요하난 등도 그랬지만 예후다는 특히 그들을 강력하게 비판했어요. 이 책의 원제는 Ἐπιστολὴ Ἰούδα로 '예후다의 편지'라고 해석될 수 있어요. 재미있게도 이 책은 서두에 필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어요. 저자의 진위 여부로 논란이 많은 신약의 서신들 중 그나마 논란 없는 책이지요. 굉장히 짧기 때문에 주제도 '거짓 교사(이단)에 대한 훈계'로 쉽게 요약되죠. 예후다는 누구보다도 강력한 표현으로 거짓 교사들을 규탄해요. 이성 없..
십자가의 가치 우리는 많은 교회가 지붕에 십자가를 달고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교회에서 십자가는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가지죠. 심한 곳은 아예 십자가를 우상처럼 떠받들기도 해요. 반대로 몇몇 교회에서는 십자가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기도 해요. 과연 십자가는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요? 십자가의 원어는 σταυρος(스타우로스)로 '말뚝, 막대기' 등을 의미하는데, 주로 십자가형에 쓰인 형틀이었죠. 이 형을 받는 죄수들은 기절할 정도로 채찍을 맞고, 온 몸의 피부가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십자가를 매고 처형장까지 걸어가요. 이 십자가는 약 18kg에서 50kg까지 예상을 하는데, 어쨌든 만신창이가 된 사람에게는 가혹한 무게죠. 처형장에 도착하면 죄수는 속옷까지 벗겨져 알몸이 되고, 손목과 발목에 17cm ..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괴로운 일이 지속되고 반복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꺾일 때가 있어요. 과연 일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게 되죠. 아무리 의지할 곳을 알고 있어도 완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괴로워 하곤 해요. 그래서 제대로 의지할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을 간절히 원하고 있죠.
2020년05월25일 예수께서는 그 아이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어린아이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누가복음 18장16절~17절) 교회의 학생들을 보며 느낀건, '난 왜 저 맑고 순수함을 가질 수 없는가' 하는 것이었죠. 이제는 그 시절 그 마음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조금이라도 되새겨볼 뿐이에요. 그 어린 마음들이 천국의 열쇠라는 사실을.
요한서(이요안누) 이 앞의 서신들이 디카이오스, 생활의 교훈, 신앙의 특징, 교회, 구원, 지도자의 자세 등을 다뤘어요. 예슈아는 신앙 그 자체였기 때문에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았죠. 그러나 영지주의가 생기면서 이 부분의 설명도 필요해 졌어요. 영지주의는 그노시스 학파라고 해서, '신의 순수한 작품은 영 뿐이고 물질은 악마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하는 학파에요. 물질 전체를 부정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슈아의 신성은 인정해도 인성은 인정하지 못했던 거에요. 그들은 예슈아가 보인 몸은 환상일 뿐으로 인간의 몸으로 온 적이 없다고 주장해요. 예슈아의 제자로 직접 예슈아를 겪었던 요하난은 그 주장을 인정할 수 없었죠. 요하난은 이 영지주의자들을 '크리스토스의 적'이라고 규정하며 강력하게 비판했어요. 이 책이 바로 Ἰωάννου,..
긍휼은 사랑의 실천 "내가 바라는 것은 인애이지 제사가 아니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 번제가 아니다."(호6:6) "너희는 가서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9:13) 교회에서 긍휼(矜恤)이라는 말을 정말 많이 써요. 하지만 그 진짜 의미를 알고 실천하고 있을까요? 이 말은 일상 속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말이기도 해요. 교회에서 주로 듣게 되는 말이죠. 그 의미는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준다'에요. 한글성경에서는 인애, 긍휼, 자비, 은혜 등 여러가지 단어로 혼용해서 표기되고 있어서 다소 애매한 느낌을 줘요. 그렇다면 원어로는 어떤 단어일까요? 구약에서 주로 말하는 긍휼은 히브리어로 라하밈(רחמים)이라고 해요. 이 단어는 자궁을 뜻하는 라함(תגיד)에서 파생되었어요. ..
광야를 지나며 광야를 지나며 삶은 어째서 괴로움 뿐일까요? 삶은 어째서 막연함 뿐일까요? 삶 자체가 광야라는 느낌이 들어요. 의지할 곳 없는 막막한 광야... 그 막막한 곳에서 내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보다 더 반가운 것이 있을까요? 그래요, 내가 이 삶 속에서 기댈 수 있는 존재. 그 분이 광야 속의 내 친구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