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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03월23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정해졌습니다. 내 마음이 정해졌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다해 노래하고 찬양합니다. 내 영혼아, 깨어라! 하프와 리라여, 깨어라!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 (시편 57편7절~8절) 하루를 시작하며 주께 감사하고, 감사의 기도로 시작하는 하루는 잠드는 순간까지 감사히 끝납니다. 내 마음 흔들림없이 주만 바라봅니다.
빌립보서(프로스 필리페시우스) 파울로스는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교회들을 걱정하며 편지로 설교를 전했어요. 이 편지들이 지금까지 남아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있죠. 이 책도 마찬가지로 감옥에서 작성된 편지에요. 이 책의 원제는 προς φιλιππησιούς로 '필리피로 보내는 편지'로 해석될 수 있어요. 파울로스의 상당수의 편지들이 그렇듯, 이 편지도 3개의 편지가 합쳐졌다는 말이 있어요. 주제와 어조가 갑자기 바뀌는 것도 그렇고, 특히 에파프로디토스의 건강상태가 급변하는 것을 보면 한 번에 작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겠죠. 그래서 4장을 첫 번째, 1장~2장을 두 번째, 3장을 세 번째 편지로 본다고 해요. 이 책의 주제는 '주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에요. 파울로스의 편지들 중에 이 편지는 '교회론'을 확립했다는 평을 받고 있..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경건 경건이라는 말처럼 교회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도 없을 거에요. 그런데 이 말은 일상 속에서는 흔히 접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해요. 과연 교회만을 위해 정의된 말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은 그리스어 ευϕσεια(에우세베이아)에요. 단어의 뉘앙스만 놓고 보자면, '신을 경외하는 태도'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흔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 자체라고 이해하는 것 같아요. 이 경건이라는 말은 신약에서는 여러 번 보이고 있어요. 이 말을 특히 강조하며 정의했던 사람으로 파울로스를 들 수 있어요. 파울로스는 티모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은 선하고, 감사함과 함께 취해진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거절된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만남을 통해 거룩해 ..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항상 있는 삶의 위기 속에서 나는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는 걸까... 돌아보면 나를 만드신 분이 언제나 나를 지키고 계시다는 것이, 나에게는 새삼 감동이 됩니다.
2020년03월16일 "이제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 (요한복음 4장23절~24절) 늘 주께 감사하며 주를 느끼는 나날이지만, 그 감사를 진정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예배가, 나에게는 그 어떤 일보다 소중합니다. 매일 기다려지는 한주의 시작, 그것은 나에게 큰 힘이 됩니다.
에베소서(프로스 에페시우스) 파울로스의 편지처럼 저자를 의심 받는 책도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성경을 구성하는 책들의 중요한 점은 메시지이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썼는 지에 대한 문제로 많은 논쟁이 있었죠. 이 책은 파울로스가 줄곧 강조했던 디카이오스가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울로스의 저작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결국 이 안에도 디카이오스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죠. 이 책의 원제는 προς Ἐφεσιους로 '에페소스로 보내는 편지'로 해석될 수 있어요. 다만 초기 사본에는 정확한 수신처가 나오지 않아서 과연 에페소스로 보내는 편지가 맞는 지조차 의심 받았었죠. 과연 그게 중요한 문제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 책의 주제는 '믿음 안에서 하나된 우리'에요. 수신처가 에페소서의 ..
구원에서 구원 천국이 멀어지는 교회일 수록 신앙과 멀어지고 부도덕한 모습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찬가지로 구원의 개념도 이 현실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비도덕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현실과 신앙이 가까워 지기 위해서는 신앙의 기본 개념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교회에서 강조하는 두 가지가 천국과 구원. 특히 이 구원은 교회 안에서 신앙을 시작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였던 것 같아요. 때때로 이 구원을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 결과는 도덕무용론으로, 비도덕적인 모습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죠. 제가 있던 교회 중에는 구원 받은 날을 생일로 지정하고 기억하라고 하는 교회도 있었어요. 언제 구원 받았는지 정의할 수 있을까요? 대체 구원이 무엇이길래 그런 걸..
시선 시선 제 인생이 언제 바뀌었나 생각해 보면, 삶을 보는 시선이 바뀌었을 때였던 것 같아요. 눈 앞의 위기는 그저 저를 얽매고 절망하게 할 뿐이었지만... 주님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이 위기는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느껴졌어요. 넓은 세상 속에서 저는 참 작은 존재이지요. 앞만 보는 시선으로는 알 수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