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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생각/삶 돌아보기

성탄절, 기쁘고 즐거운 날 크리스마스는 이미 전세계적인 이벤트가 되었죠. 나라 별로 크리스마스를 가리키는 명칭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어요. 한자문화권은 성탄절(聖誕節)이라고 하고, 아랍권에서는 이드 알 밀라드라고도 하고, 크리스마스 트리 때문에 이드 알 샤쟈라 (나무의 명절)이라고도 한다네요. 유럽에서는 탄생을 뜻하는 단어를 써서 프랑스에서는 노엘(Noël), 이탈리아에서는 나탈레(Natale), 스페인에서는 나비다드(Navidad) 독일에서는 신성한 밤이라는 의미로 바이나흐텐(Weihnachten)이라고 한데요. 어느 나라건 탄생을 뜻하는 의미이긴 하네요. 그럼 우리가 흔하게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우선 크리스+마스로 이해하시는게 빨라요. '기름 부어진 자'를 의미하는 마쉬아흐가 라틴어로는 크리..
하나님의 꿈, 나의 꿈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꿈을 품게 되죠. 비록 세월이 지나면서 그 꿈을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꿈을 잃기도 하지만, 우리가 꿈을 품고 노력하며 살았던 그 세월은 인생에서 아름다웠던 시기라고 느끼죠.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어요. 하나님에게도 꿈이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우리보다 완전한 인격을 갖추신 분이라면... 그 분에게도 꿈이 있지 않을까?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라는 것. 그 마음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어지고,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품 속에서 맺히는 사랑의 열매들. 오랜 방황 끝에 돌아온 저는, 어쩌면 하나님의 열매일지도 몰라요. 어쩌면 하나님의 꿈이 저일지도 몰라요.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하나님의 꿈이 저의 꿈..
반복되는 역사 역사는 반복된다고들 하죠. 신앙의 역사라고 특별히 다르지는 않더라고요.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고대부터 초대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지난 역사를 봐왔어요. 하지만 성경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에요.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거에요. 요한묵시록의 소아시아 7교회의 이야기는 지금 교회의 실태와 상당히 비슷해요. 구약에서 반복되었던 타락, 심판, 회개, 회복. 이 사이클은 우리들의 삶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저 역시 하나님과 떨어져 있던 시기가 있었고, 어떤 계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 회개하고, 하나님의 보호로 회복될 수 있었거든요. 성경의 많은 인물들과 국가, 사건들은 어쩌면 지금의 나 자신에게 경고하거나 위로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몰라요.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
술과 방탕 흔히 교회에서는 술을 금하곤 해요. 그러면서 인용하는 말씀이 에베소서 5장18절. "또한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방탕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십시오." 하지만 이후에 디모데전서 5장23절에는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그대의 위장과 잦은 병을 생각해 포도주도 조금씩 먹도록 하여라." 라고 적혀 있어요. 둘 다 파울로스가 쓴 편지인데 대체 어떤 말씀을 따라야 하는 걸까요? 고대 로마는 석회질이나 수은 등의 이유로 수질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멀리서 맑은 물을 끌어와서 마시다 보니 식수가 넉넉하다고 하기 어려웠죠. 또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다 보니 멀리서 끌어온 물의 위생상태도 신뢰하기 어려웠죠. 그래서 포도주에 물과 식초를 조금 섞어서, 소독하고 정화하여 마..
하나님의 공평함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의 탈란트 이야기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5탈란트 받은 자는 5탈란트 남기고, 2탈란트 받은 자는 2탈란트 남기고, 1탈란트 받은 자는 땅에 숨겼죠. 주인은 남긴 자들을 칭찬하고 숨긴 자를 비판하며 벌을 주죠. 우리는 우리 인생을 보며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요. 누군가는 굉장히 부유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사는가 하면, 누군가는 굉장히 가난하고 병들고 위태롭고 괴롭게 살고 있거든요. 왜 하나님이 공평하다고 하는 걸까요? 2탈란트 받은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해서 4탈란트로 만들어도, 5탈란트로 시작한 사람보다 많이 가질 수 없어요. 탈란트를 받은 세 사람은 실은 처음부터 불공평한 시작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공평함은 시작이 아니라 결과에서 드러나는게 아닐까 해요...
시간의 흐름 우리는 살면서 시간의 구애를 많이 받아요.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가 있을 수도 있고, 다가올 시간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수 있죠. 우리는 세월이라고 하는 시간에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가질 때가 있어요.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하죠. 시간에 대한 조급함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때도 있어요. 우리는 삶 속에서 타이밍이라는 것에 굉장히 집착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세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가 있어요.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아무도 모르죠. 우리가 늦었다고 생각하는 시점이 실은 하나님께는 적절한 시점일 수도 있어요. 세상이 시작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하나님께는 찰나에 불과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에요. 짧다는 말도 실은..
고난 속의 평안 우리의 삶은 괴로운 일이 참 많아요. 저 역시 혼자 살면서 직장생활에 치이는 중에는 심신이 괴로울 때가 많아요. 도대체 믿는 사람인데 어째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할까요. 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어요. 세상에서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삶도 실은 숨겨진 고통 속에서 살아가요. 때로는 부족함이 없는 삶의 회의감도 무시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하죠. 아프고 가난하고 피곤하고 배고픈 주제에 기댈 곳이 없으니 하나님 타령한다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어요. 틀린 말이 아니에요. 저에게는 기댈 곳이 없어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주께 감사드려요. 오직 주만 바라볼 수 있는 환경을 주셨거든요. 세상 사람들의 성공은 언젠가 만날 실패, 또는 반드시 겪게 될 허무 ..
친구는 신앙의 지팡이 신앙인의 친구는 누가 되어야 할까?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고민이 아닐까요? 흔히 선한 사람을 친구로 사귀어야 한다는 것은 거의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에요. 하지만 선하다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신앙인에게 선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의 삶을 말해요.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인만 만나서 신앙인끼리 어울려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런 결과, 교회는 좁아지고 말았어요. 크고 넓은 공간 속의 작고 좁은 모임. 뻗어나가지 않는 성도... 이것은 예슈아의 가르침과 완전히 반대에요. 예슈아는 평생을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수, 주류 집단에서 소외당한 사람들과 어울렸어요. 실은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이에요. 저보다 악하고 저보다 약하고 저보다 작은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실은 굉장히 큰 도움이 되..